갈맷길, 부산의 아름다운 길
구간자유걷기 | #갈맷길 7-3 자유...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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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박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6-02 20:07 조회2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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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맷길

갈맷길 7-3구간 자유걷기...210601

수안역 동래읍성 임진왜란역사관 - 동래부동헌 - 장관청 -
송공단 - 동래시장 - 박차정의사 생가 - 충렬사 -
인생문 - 복천동 고분군 ~ 복천동 박물관 ~
북장대 ~ 동래읍성 북문 ~장영실 과학동산 ~ 동래읍성 역사관 ~
서장대 ~ 동래 읍성지 ~ 동래 향교

약 7.5 km...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은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사 내에 있t습니다.
2005년 4월 수안역 공사를 위해 땅을 파던 중
해자에서 다양한 무기류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약 100명 안팎의 유골이 나왔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임진왜란 전쟁터 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들이 출토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골을 발견한 것이 2005년 4월15일인데,
살육전이 벌어진 것 또한 1592년 4월15일이었다구요.
물론 임진왜란 발발 일자는 음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교롭지 않습니까.

시간을 1592년 4월13일로 돌려봅시다.
부산 앞바다가 왜선으로 가득 찼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여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14일 새벽부터 벌어진 난전 끝에 부산진이 속절없이 함락했습니다.
왜군의 다음 목표는 동래성이었습니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1551~1592)이었는데요.
14일 오전 10시쯤 동래성에 이른 왜군이 선발대 100명을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라고 항복을 종용합니다.
송상현 부사는 “(네 놈들과)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고 일축합니다.
이 와중에 경상좌병사 이각(?~1592)과
경상좌수사 박홍(1534~1593)이 성을 빠져나갑니다.
동래성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송상현 역시 “일단 물러나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받지만
“성주가 자기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고 일축합니다.

대신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4번 절한 뒤
태연히 붓을 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답니다.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지고 다른 군진에는 기척도 없군요.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정은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양산군수 조영규와, 송부사의 집사 신여로, 비장 송봉수·김희수, 향리 송백 등
송부사의 핵심 측근들도 모두 살해됐습니다.
동래향교 노개방과 유생 문덕겸·양조한 등도 함께 순절했습니다.

동래성 전투 후 145년이 지난 1731년(영조 7) 동래성을 고쳐 쌓던
동래부사 정언섭(1686~1748)은 경악할만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으로 보이는 해골들이 다수 노출된 겁니다.
최소 12명분의 인골이었습니다.

정언섭 부사의 발견 이후 다시 280년 가까이 흐른
2005~2008년 사이 이번에는 지하철 건설을 위한 공사장에서
다시금 410여 년 전의 참극의 기억이 되살아 난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 때 죽은 사람들의 혼이 수백년 마다 한번씩 되살아나는 걸까요.
그러나 다시 쳐다보기 싫은 역사라고 해도 제쳐놓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되새겨봐야 할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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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은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의 생생한 모습은 물론, 목숨을 걸고 적에 맞선 선조들의
불굴(不屈)의 항쟁 정신과 모습을 잘 보여주는 교육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최초로 철도 역사(驛舍) 안에
만들어진 역사 전시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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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
해자란 성 외곽에 땅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한 도랑으로,
적군의 진격을 늦추는 일종의 방어시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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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기(帥子旗)'~
조선 수군 대장기
이순신 깃발 수자기…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와 싸운 이순신 장군 상징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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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열체크를 하고 사회서비스 제공증명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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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증샷을 찍고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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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치안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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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동래부 동헌 모습.
지금은 없어진 시가지 부분의 동래읍성 성곽 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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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의 행정중심지였던 동래부동헌,
동헌(東軒)은 조선 시대에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수령의 살림집을
내아(內衙)라고 하는 데 대해 외아(外衙)라고도 합니다.
충신당은 동래부 동헌의 정당(正堂)으로, 이청(吏廳)·무청(武廳)·향청(鄕廳) 등
동래부 소속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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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청(將官廳)~
1972년에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무익공(無翼工) 형식의 공포를 꾸민 팔작지붕의 ㄱ자집입니다.
조선 후기 동래부(東萊府) 청사 건물의 하나로 이곳 군 장관들의 집무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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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공단~
송공단(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은
1742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임란 당시 동래부사였던 송상현 공이
순절한 정원루(靖遠樓)가 있던 자리에 설치한 제단(祭壇)입니다.
이곳에는 송상현 공을 비롯해 임란 당시
순절한 여러 선열들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동래기영회는 동래읍성이 함락된
매년 음력 4월 15일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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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의사 생가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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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와 근우회에 몸담았고,
김원봉 의열단장과 부부 사이였던 박 의사의 독립투쟁은
2015년 개봉한 1000만 영화 ‘암살’을 통해 새롭게 조명됐습니다.
박 의사의 오빠인 박문희 의사는 신간회 간부로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지원하다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에서 활동한 박문호 의사는 옥중 고문 끝에 가석방된 뒤 6개월 만에 숨졌고,
2019년에야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들 남매의 부친도 일제 통치를 통한하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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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구에 있는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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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의사~
박차정[1910~1944]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근우회(槿友會)와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고
1944년에 순국한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박차정 의사 생가는 1936년에 건립되었으나,
원래의 건물은 거의 파손되어 본래의 형태를 찾을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박차정의사 숭모회는 1996년부터 지속적으로
복원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부산시에서 부지 매입비를,
국가보훈처에서 생가 건립비를, 동래구에서 도로 개설비를 각각 지원하여
2005년 7월 8일 과거 가옥의 모습에 근거한
박차정 의사 생가를 복원, 건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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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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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에서 간식을 나누며 휴식을 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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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1592년 왜적이 동래읍성으로 쳐들어와
송상현 동래부사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송공은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글을 나무판에 써 적진으로 던지고, 왜적과 싸우다 순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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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줄당~
소줄당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국충절의 호국정신과 그 학행을 후세의 사표로 삼기 위해
1652년(효종 3)에 교육도장으로 건립한 강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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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관람하여 해설을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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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 육군박물관 소장)’
왜군에 끝까지 맞서 순절한 송상현 부사와 백성들의 항전을 그린
큼지막한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 육군박물관 소장)’
사본을 보며 설명을 들으니 훨씬 생생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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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 첨사 정발~
정발과 부산진의 병사들은 그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 저항의 시간이 하루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은 1만8600명이었고,
부산진성의 병력은 겨우 600명이었습니다.
이 병력으로는 성벽에 고르게 수비대를 배치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종전 후에 정발은 포장을 받았지만, 다른 장군에 비하면 포상이 늦었습니다.
그나마 후손이 상소를 하자 뒤늦게 정부에서 조사를 벌였습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승전한 장병을 포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죽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사람도 높여야 합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헌신에 큰 빚을 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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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투~
1년 전 부임한 동래 부사 송상현은 유키나가의 항복 권유에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즉 ‘싸우다 죽을지언정 길을 내줄 수는 없다’는
답을 목판에 적어 성 밖으로 던졌습니다.
그 6자의 각오는 사실 임금과 조정을 비롯한
후방의 군인 백성들에게 보라고 내건 결사 항전의 깃발이었습니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일부 피신한 이들을 제외한
병사와 성민 약 5,000명이 학살됐고,
약 500여명이 전시 노역을 위한 피로자(被虜者)로 끌려갔습니다.
전사 직전 송상현이 남겼다는
“孤城月暈(고성월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로
시작되는 4언절구 한시의 주제 역시 군신의 의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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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 등
부산지역 호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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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을 모두 둘러보기 위해서는 동장대(東將臺)가 있는
충렬사 뒷산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동절기에는 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산은
화재예방으로 입산이 금지되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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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내 충렬사 뒤쪽에 위치한 군 관청.
조선시대 동래부 청사 건물의 하나로 군관들의 집무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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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문~
인생문 고개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합니다.
첫째로는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 고개를 통해 피난한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 하여 사람을 살려낸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죽은 자들의 무덤을
성내에 둘 수 없어 성 밖에 있던 묘지[현재의 명장동 일대]로 옮기는
유일한 통로라 하여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말에서 나온 지명으로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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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에서 도로가 통과하는 곳에 위치한 인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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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단비[ 永報壇碑 ]~
1909년(순종 3) 일제가 호적 대장을 거두어들이려고 하자
동래 사람들은 조상들의 성명이 적힌 호적 대장을 함부로 내어 줄 수 없다며
동래 지역 13개 면 호적 대장을 모아서 마안산 기슭에서 태운 뒤
그 자리에 단을 쌓고 영보단(永報壇)이라 하였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15년 비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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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두령 쉼터에 있는 청동칠두령을 본 딴 조형물
복천동 고분군 22호분 출토인 청동칠두령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유물 중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야만의 독창적인 금속공예품으로 평가되어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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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박물관은 현재 남아 있는 부산지역 주요 성곽유적들의
사진 자료를 한 자리에서 조명하는 ‘부산의 성곽’ 전을
7월 25일까지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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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는 조선시대까지 수많은 성곽이 만들어졌는데,
지금까지 38곳의 성곽 명칭이 확인됐습니다.
부산에서 확인된 읍성만 해도 동래고읍성을 비롯해
동평현성, 기장고읍성, 동래읍성, 기장읍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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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왜성 흔적만 해도 증산, 자성대, 구포, 죽성리,
임랑포, 죽도, 가덕도, 동삼동, 동래 등 10곳 가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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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한쪽에서는 부산 성곽의 아름다움도 영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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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정사를 지나 북장대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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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란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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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의 북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북장대.
부산 주변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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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이곳을 중심으로 동래읍성 역사관과 장영실과학동산,
내주축성비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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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역사관과 장영실과학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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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동래 ‘동래읍성(東萊邑城)’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에 있는 동래읍성은
3개의 나지막한 산과 평지를 둘러싸여 이루어진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입니다.

지금은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의 평지 쪽 산성은 남아있지 않고
산 쪽에만 성곽이 남아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시가지를 만든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나마 남아있던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벽을 전부 철거했기 때문입니다.

산 쪽의 성곽은 부산광역시가 1979년부터 2~3년씩 1993년까지
부분적인 복원과 보수를 시작,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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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동래읍성의 4대문 중 유일한 문입니다.
원래 동래읍성에는 동문인 지희루(志喜樓)와 서문인 심성루(心成樓),
남문인 무우루(無憂樓), 그리고 북문 등 4대문과 인생문(人生門),
암문인 은일루(隱一樓) 등 모두 6개의 문이 있었지만,
동·서·남문과 암문은 모두 없어지고
현판만 동래구 수안동에 있는 동래부동헌의 충신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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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개관한 동래읍성역사관
이곳에서 동래읍성의 유래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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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의 지휘소였던 서장대.
서장대 뒤쪽으로 동래읍성을 둘러싼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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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과 읍민이
혼연일체가 돼 최후의 한사람까지 항전하다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최대의 격전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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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향교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 있는 조선 전기 지방민 교육과
유교 성현 봉사를 위한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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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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